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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책을 따라 여행하기

by 감사하쟈 2025. 2. 23.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덮고 난 후에도 책 속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공간에 대한 기록 같았다. 그저 활자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직접 느껴보라는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책 속의 장소를 직접 가보기로.첫 행선지는 경주였다.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등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보고 싶었다.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바라봤던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준비하며 책장을 다시 넘겼다. 익숙한 장소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이었다. 그렇게 배낭을 꾸리고 기차에 올랐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책

경주에서 신라인의 흔적을 찾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주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익숙한 도시의 소음이 아니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고즈넉함이 가득했다. 역을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하니, 현대적인 상점들 사이로 기와지붕을 인 전통 가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 년을 견뎌온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이곳이 여전히 과거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책에서 읽은 대로 나는 불국사로 향했다. 유홍준 교수는 이곳의 석축을 신라인의 건축 철학이 집대성된 곳이라 했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사찰에 들어서자마자 석가탑과 다보탑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적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감회가 달랐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석재 표면은 햇빛을 받아 은은한 색감을 띄었고, 곳곳의 조각은 장인들의 세심한 손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단순히 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이상적인 세계를 담고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일부러 음악을 듣지 않고, 바람 소리와 내 발걸음에 집중했다. 이 길을 따라 걸었던 천 년 전의 순례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은 불심을 다지며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석굴암 앞에 서서 불상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말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책에서는 석굴암을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불교 예술이라 표현했지만, 직접 본 느낌은 그 이상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불상의 표정, 절묘한 비율, 자연광이 들어오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경건함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녁 무렵, 첨성대 근처를 걸었다. 해가 지면서 도시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행나무 잎들이 거리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고, 조용한 골목길에서는 오래된 돌비석이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유홍준 교수는 경주를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정확히 와닿았다. 이곳에서는 어디를 가든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여정을 마무리하기 전, 나는 황룡사지 터를 찾았다. 지금은 기단 일부만 남아 있지만, 한때 이곳은 신라가 꿈꾸던 거대한 불교 왕국의 중심이었다. 이곳에 서서 나는 상상했다. 천 년 전 이 자리에 서 있던 신라인들은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들이 남긴 유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경주에서 보낸 하루는 책 속에서 읽었던 장소를 직접 경험하면서,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라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마음으로 새기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말하는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 싶다.

부여에서 백제의 시간을 거닐다

부여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한 나라의 마지막 순간이 서린 곳이었다. 백제의 수도로서 번영했던 이곳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무너졌고, 그날의 기억은 강물처럼 이 땅을 감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책에서 읽은 역사적 순간들을 떠올리며 '부소산성'으로 향했다.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는 순간, 문득 백제의 신하들과 군사들이 이곳을 지키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부소산성 정상에서 내려다본 백마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고요한 물결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낙화암'에 얽힌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슬픔 속에서 몸을 던졌을 궁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전설과 역사가 맞물리는 이곳에서, 나는 잠시 책을 덮고 강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았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여 곳곳에서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서는 한동안 발길을 멈췄다. 화려한 고려 시대의 석탑과 달리, 이 탑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이곳을 두고 백제의 미의식이 가장 절제된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이라 표현했다. 실제로 마주하니 그 말이 절실히 와닿았다. 웅장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석탑의 모습에서 백제의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해질 무렵, 나는 궁남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에서는 이곳을 '백제 별궁의 정원'이라 소개했는데, 실제로 보니 넓은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을바람이 살며시 스쳐 지나가는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니, 이곳이 한때 왕과 신하들이 머물며 정치를 논하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들었다. 부여에서의 하루는 유적, 그 속에 담긴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강화도에서 고려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강화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땅이자, '팔만대장경'이 탄생한 곳이다. 책에서 유홍준 교수는 이곳을 고려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도시라고 표현했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그 흔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산성'으로 가는 길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길게 이어진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13세기의 고려인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벽 하나하나에는 전쟁의 기억이 서려 있는 듯했고, 성돌 위로 스치는 손끝에서 과거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고려의 왕과 신하들은 이 성벽 뒤에서 어떤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을까? 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밤을 지새웠던 날들이 떠올랐다. 강화산성을 따라 걸으며, 나는 몽골의 침략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들을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고려의 정신을 지키려는 신념이었으리라. 산성을 지나 선원사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유서 깊은 장소다. 책에서 읽은 대로, 고려의 학자들과 장인들은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손으로 하나하나 경판을 새겼다. '칼이 아니라 글자로 나라를 지키려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바람이 불어오는 사찰의 마당 한편에 앉아, 그들이 한 글자씩 새겨 넣던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강화도의 풍경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고려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역사 탐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인들의 선택과 그들이 남긴 신념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순간이었다. 유적이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야기로 남을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걸었던 이번 여행은 단순한 유적 탐방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사람들의 삶을 헤아려보는 과정이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이 길 위에서 얻은 감각과 배움은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 것이다.